Yes We Cam - notes



이야기는 2012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시작된다. 강정마을은 공동체와 자연을 박살내고 동북아 평화 어쩌구를 위해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국가의 발상에 반대하는 주민과 활동가들이 이미 수년 간 투쟁하고 있는 곳이었다. 당시 국가는 해군기지 건설에 앞서, 강정마을 앞바다에 펼쳐진 아름다운 구럼비 바위를 발파하려 했다. 상황은 고조되었고 연대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시민들의 발길보다 경찰의 발길이 항상 훨씬 더 많았다. 수십 수백명의 경찰들이 마을 곳곳과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경찰 카메라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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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 찍는 사람이 많으니 그에 대적하는 상대로서 나도 저들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눈에는 눈 , 카메라엔 카메라. 단순한 적대의식으로 채증하는 경찰을 채증하는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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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없었던 건지 경찰의 폭력이 과했던 건지, 나는 촬영 과정에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수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유치장에 구류되었다. 첫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나에게 이러저러한 사실 여부를 물었다. 나는 내 직업은 에... 사진가이고... 저시기... 그저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있었을 뿐... 이라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진가고 나발이고 경찰은 내 말을 듣지도 않았다. 지문을 찍고 신원을 조회 당한 뒤 유치장에 갇혔다.
연행 당시 눈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니 양눈이 퉁퉁 붓고 눈물도 줄줄 났다. 같이 갇혀 있던 활동가의 항의로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경찰은 마치 노예 다루듯 내 양손을 포승줄에 묶고 차량에 밀어넣어 시내에 있는 안과로 데려갔다. 심각한 근난시에 렌즈도, 안경도, 카메라도 없던 나에겐 모든 장면이 새하얗고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여간 끔찍한 기억인데, 당시의 나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모든 과정에 순순히 굴복했다.
유치장에서 나온 뒤, 당시 비슷한 시간대 그리고 같은 현장에 있다가 체포된 평화활동가 앤지 젤터의 일화를 들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이름을 묻자 “내 이름은 구럼비”,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 구럼비를 지키자”, 거주지와 국적을 묻자 “현재 강정에서 살고 있는 세계시민” 이라 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 용기에 감탄함과 동시에 뒤늦은 굴욕감을 느꼈다 . 비겁하고 아둔한 호구였던 나 자신이 미웠다.
이후 경찰에 대한 적대감과 집념은 강해졌고 나는 채증하는 경찰을 채증하는 일에 몰두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셔터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찍다가 필름이 떨어져 아무것도 찍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와도 공셔터를 마구 날렸다. 배터리가 떨어져도 상대를 겨눈 채 사진 찍는 자세를 취했다. 찰칵, 찰칵, 찰칵. 탕,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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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증하는 경찰을 채증한 사진을 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었다. 더러운 행위가 찍힌 더러운 사진들. 더러운 사진들을 내 나름의 미적 감각에 맞춰 촬영하고 편집하는 일도 역겨운 일이었다. 동시에, 현장에서 경찰을 찍는 게 고통 받는 시민들을 찍는 것보다는 덜 더럽고 역겨운 일이 아닐까 하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윤리적 고민을 했다. 복잡한 죄책감은 쌓여갔지만 고민할 틈은 없었다. 채증하는 경찰을 채증하는 일도 멈출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전방에서 서로 부딪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뒤에서 서로 사격하는 누군가가 있듯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카메라를 겨눴다. 나는 그저 채증하는 경찰의 대항자로서 현장에 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대칭을 맞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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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것은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2015년 어느 날, 거주하던 지역의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어쩌구 법을 위반했으니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서에 출석하니, 경찰은 나에게 A4용지에 인쇄된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집회 장면을 찍은 상당히 멋진 사진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인물이 있었는데 모두 나의 얼굴과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닮은 인물이었다. (결코 내 얼굴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은 이게 당신이냐 물었다.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몇 주 후 동일한 출석요구와 조사 과정이 한 차례 더 벌어졌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나에게 A4용지에 인쇄된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번 사진은 좀 대충 찍은 듯했다. 이번엔 특정인의 얼굴을 확대하여 용지에 꽉 채워 인쇄한 사진도 있었다. 하여간 이 역시 공통적으로 나의 얼굴과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닮은 인물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모자와 똑같은 모자도 쓰고 있는 인물이었다. 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검찰에서 보낸 무슨무슨 명령서라는 것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검찰에 전화해보니, 일반교통방해죄를 어긴 대가로 나에게 500만원의 벌금이 고지된 것이라 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무슨무슨 명령서에 기재된 범죄사실을 보니 경찰 조사와 검찰에 의하면 나는 무려 이러저러 무시무시한 사람들과 공모하여 2014년 8월 15일 19시~22시경에는 보신각 사거리에서 종로 2가에 이르기까지 양방향 8개 전 차로를 점거하여 차량의 교통을 방해하였고, 2015년 5월 1일 15시~16시경에는 종로 2가로 행진하다가 창덕궁 앞 도로로 이동하여 17시~19시경까지 창덕궁 앞 전 차로를 점거하는 등 차량의 교통을 방해하였다. 아, 내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나. 하여간 500만원의 벌금은 근근히 빌어먹고 살던 나에게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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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벌금 500만원 이야기의 결말은 시시하니 보다 중요한 질문을 짚고 넘어가자. 어떻게 경찰은 수많은 집회 참여자 중 나와 같은 특정 소수 인원을 식별하여 수사에 착수하고 출석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대충 찍힌 사진 속 특정인이 김민(처럼 생긴 얼굴)이다! 저놈이 김민이다! 라는 걸 어떻게 파악했을까?
경찰이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기 위해 구축한 체계는 오랜 기간 치밀했으며 지독히 체계적이었다. 2001년, 경찰은 집회 및 시위 현장에서 카메라를 통해 채증한 자료를 입력하고 관리하기 위해 채증판독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간 수천 수만명의 얼굴이 채증판독프로그램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었다. 2012년 제주도에서 연행당해 경찰 측에 범죄 기록이 남은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 그럼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자료는 어떻게 사용될까? 믿거나 말거나, 경찰 측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담당 경찰들이 채증판독프로그램에 올라온 사진들을 육안으로 직접 살펴보며 찍힌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낸다 카더라. 누군가 내 얼굴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여간 이러한 육안을 통한 식별과 더불어 페이스북과 텔레그램 등 SNS염탐, 그물망식 기지국 수사를 통한 특정인의 시간대 별 위치 파악 등 다양한 기술들이 교차적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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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대략 2016년까지의 이야기다. 현재 인공지능 기술의 가파른 발전에 힘입어 국가의 감시와 탄압 체계는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 그것이 경찰의 채증카메라든,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설치한 다목적 CCTV든, 카메라에 기록된 우리의 모든 이미지는 인공지능 기술 발전을 위한 훌륭한 원료가 된다. 국가는 그간 적재해둔 우리의 이미지를 산업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사기업에 넘기고 사기업은 이를 통해 기술을 고도화시켜 사적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국가 감시 체계에 기꺼이 이바지한다. 얼굴 인식, 행동 인식, 복장을 통한 실시간 추적, 나아가 표정과 몸짓을 통한 범죄 가능성 분석까지, 우리의 이미지를 통해 고도화된 감시 기술은 우리를 더 강하게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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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벌금 500만원 이야기의 결말은 시시하다. 나는 또 비겁하게 '나는 사진가이고 집회 참여가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있었다' 라고 항변했으며, 국가 탄압에 맞서는 훌륭한 변호사 덕분에 최종 무죄를 선고 받았다. 500만원이라는 짐이 사라졌으니 아주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었지만, 판결문을 보니 또 뒤늦은 굴욕감이 찾아왔다. 나의 주장대로, 판사는 나를 집회 참가자가 아닌 사진가로 판단하고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나는 사진가는 맞긴 하지만 '정말로' 집회 참가자가 아니었나? 나는 같은 시민으로서 무언가에 항의하고 시위하기 위해 그곳에 모인 게 아니었나? 나는 그저 관찰자일 뿐이었나? 돌이켜보면 치욕적인 무죄였다. 하지만 500만원의 벌금은 솔직히 정말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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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나는 망한 것 같다. 감시체계를 들여다보면 감시체계도 나를 들여다본다. 들여다보기만 할까. 나를 집어삼킨다. 저항할 목소리와 의지까지 집어삼킨다. 애초에 별로 많지도 않았던 용기가 사그라든다.
그러나 우리는 망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이름은 구럼비”라고 말한 평화활동가의 대답을 떠올린다. 이 모든 것에 대항하고 바꿔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린다. 매 순간 채증카메라를 쳐내던 시민들을 떠올린다. 2020년 시위진압 경찰의 얼굴을 얼굴인식 기술을 통해 식별한 후 공개했던 프랑스의 한 예술가를 떠올린다. 미국에서 홍콩까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CCTV를 박살내는 전세계 사람들을 떠올린다. 얼굴인식 기술을 교란시키기 위한 수많은 기술적 대항 방식을 떠올린다. 권력의 명령에 불복하고, 꺾이지 않는 수많은 의지들을 떠올린다. 내가 망할 수는 있어도 우리는 망하지 않을 수 있다. 에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거리에 나간다면 행적을 감추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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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사진과 카메라가 권력의 민중 탄압 도구로 활용된 것은 사진 역사의 시작부터 함께 한다. 이에 대해선 과학잡지 에피 19호에 게재된 ‘빛을 담는 사진의 어두운 역사- 인공지능 식별추적 시스템의 위험성’에서 일부 다루었다. 또한 해당 글은 <박상우의 포톨로지 - 베르티옹에서 마레까지 19세기 과학사진사(2019), 박상우, 문학동네> 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관심 있다면 이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시고. 한편, 한국의 감시체계에 맞서온 시민사회 진영 특히 진보네트워크센터 등의 노력이 많은 것을 바꿔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좋겠다.